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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 < 정우성, 이정재 > 

2022년 8월 10일에 개봉한 이정재의 첫 연출작입니다. 제5 공화국 시절인 198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원래의 제목은 남산으로 할 예정이었으나, 판권 문제로 인해서 지금의 제목인 헌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조직에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서 서로를 의심하는 두 안기부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대한민국 1호 암살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며 펼쳐지는 첩보 액션 영화 "사냥꾼"이 될 것인가, "사냥감"이 될 것인가?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고위 인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국가안전보위부 해외팀 박평호(이정재 분)와 김정도(정우성 분)가 비밀공작에 나섭니다. 치열한 대립과 경쟁 속에서 국내외 팀들은 스파이를 통해 극비 정보가 유출되면 상대팀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들이 밝혀내지 못하면 간첩으로 지목되고, 서로를 맹추격하던 '박평호'와 '김정도'는 숨겨진 실체에 접근해 결국 '대한민국 1호 암살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맞게 됩니다."  하나의 목표, 두 개의 총 의심과 경계 속에 두 남자의 신념을 건 싸움이 시작됩니다.

 

헌트에 대한 평가들

여름 맞이 국내산 자본 영화 사이에서는 가장 저평가받았으나 사전 블라인드 시사회 그리고 이동진 평론가의 gv후기에 따르면 첫 연출을 맡은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인대도 불구하고 퀄리티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잘 짜인 스파이 스릴러물의 전형적인 구조에 이정재와 정우성을 필두로 주연과 조연들의 연기가 아주 훌륭하며 액션씬이 화려하진 않지만 소소하게 잘 깔려서 볼거리가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논란이 제기되기 쉬운 현대극이지만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치지 않아 밸런스가 잘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구간이 존재하는 문제가 헌트에서도 존재하며 작중 자주 나오는 무전기를 이용한 대화나 외국인 배우의 어설픈 한국어 대사가 이질적으로 들린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후반부의 극 전개에 비해서 전반부의 전개가 여러 가지 사건이 얽혀있어서 다소 복잡 난해할 수 있으며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평도 있습니다. 그래도 라이벌 작품들 중에 개연성이 그나마 훌륭하다고 평 받았다고 합니다.

 

팩션 물이라서 실제 역사를 완전하게 따라가지 않으며 이동진의 리뷰에서도 그렇듯 한국의 현대사의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단체를 모티브로 다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용 자체는 단순해서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라고 합니다. 

 

또 상황의 전개가 빠르게 넘어가면서 생략하는 부분도 많아서 인물들의 갈등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도 있습니다. 이런 평은 한국의 현대사를 잘 모르는 해외 관객일수록 심하게 느껴 외국 시사회 때 내용 이해를 잘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영화의 호평 요인은 긴장감이 잘 떨어지지 않으며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첩보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를 잘 이해하고 소화했다는 것이며 또 1980년대의 시대 묘사를 철저하게 해냈다는 점입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더해서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다음 이야기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능력이 일품이었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밸런스 있게 구성을 잘했다는 평입니다.

 

또 인물들의 갈등이 극이 진행되면서 더욱더 감정적의 끝 치닫게 되는데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이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모든 감정을 폭발시키고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서 극의 폭발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영화 전반에 존재하는 액션씬도 이동진의 평과 같이 단순히 인물들이 총싸움을 한다기보다는 인물들이 가진 서사와 감정이 액션신을 통해서 분출된다는 것이 호평할만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구성이 짜임새 있으며 부드럽게 흘러가기 때문에 클라이맥스까지도 인상 깊게 뇌리에 남는다고 합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 삼아서 잘 짜인 짜임새 있는 첩보 액션으로서 장르물을 즐기는 팬이라면 추천할만한 영화로 평가됩니다. 호불호가 명해서 이정재 감독의 입봉작으로 성공적이라고 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정재의 영화계에서의 평판이 매우 좋을 것이라는 영화 팬들의 추측도 뒤따랐는데 촬영의 구도나 ost사용 소품들의 디테일도 훌륭했으며 그와 함께 대거 출연한 카메오 출연진이 영화계에서도 잔뼈가 굵은 배우들로 채워져 있어서 영화 전체적으로 몰입감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영화 중간에 몰입감이 올라가면 올라갔지 떨어질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1980년도 전후 배경

●하나회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11기 사관학교 중심의 군 조직과 비밀결사였습니다. 1980년에는 국가안전보장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과 국군기무사령관으로 지휘권을 잡은 전두환 국장을 중심으로 조직됐습니다. 

 

회원 수는 1,300여 명으로 주요 활동으로는 군 내 정보 수집 및 조정, 인사 개입, 정치자금 모금 등이 있었습니다. 1981년 4월 중앙 정보부장에 취임한 전두환 중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야당 장성들이 반발하며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습니다. 

 

6 공화국으로 정치지형이 재편됐음에도 회원당이 대통령이 된 노태우 정권은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남아있었지만 전두환과 노태우의 내분으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1993년에 전격 숙청되면서 모든 동력을 상실하고 해체되었습니다. 

 

●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 근교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 공작원 네 명이 폭탄을 실은 차량을 몰고 아웅산 묘역으로 돌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및 수행원 17명, 이범석 외무부 장관 및 수행원 17명, 김동휘 상공부 장관 및 수행원 16명,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및 수행원 13명, 이계철 주 버마 대사 및 수행원 4명 등 모두 49명이 사망했고 14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범인들은 현장에서 사살됐습니다. 

 

이른바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입니다. 이번 사태는 대한민국 외교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국교 수립 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긴 했지만 국가 원수 암살 기도라는 초유의 사태였기에 국민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전두환 대통령의 신속한 대처 덕분에 추가 피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1982년 4월 초순경 사채시장의 큰손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 부부가 대규모 어음사기사건으로 구속됐습니다. 장영자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미모와 언변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데 능한 인물로 명성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국회의원과 안기부 ( 중앙정보부 ) 차장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이철희와 화려한 언변술의 장영자가 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을 찾아가 남편 이철희의 과거 경력을 들먹이며 "특수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 하며 현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업체들로부터 수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아냈습니다. 

 

공영토건에서는 빌려준 현금의 9배에 달하는 1,279억 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습니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서 생긴 돈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며 똑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이걸 계속 반복해서 받은 어음의 총액은 7,111억 원이고 이 중 6,404억 원을 할인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처음 종잣돈을 제외한다면 마치 폰지사기나 다단계처럼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셈이었습니다.

 

참고로 신군부가 3 공화국과 4 공화국의 대표적인 사기 추척자로 지목한 10명의 불법축적 금 총액은 853억 원, 장영자 부부가 받은 어음 총액은 7111억 원이었습니다. 2022년 현재도 7111억 원이면 대기업을 쥐락펴락하고도 남는데, 당시에는 셀 수 없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포항제철에 이은 업계 2위 일신제강(현 KG스틸), 도급 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 등이 모두 부도가 났다. 그리고 장영자와 이철희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 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이 선고되었습니다.

 

● 5. 18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신군부 세력 퇴진과 김대중 석방 및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마침내 비상계엄령 해제와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바로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 '김대중 석방', '독재 타도'였다. 이렇게 하여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고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져 다행스럽습니다.

 

리웅평 귀순 이야기

1983년 9월 1일 오전 11시 30분경 북한 공군 조종사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대한민국 영공으로 넘어왔습니다. 북한군 최고위급 인사로는 최초의 귀순 사례였습니다.

 

비행기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몰래 듣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자유 속에서 나는 막연하게 남한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고 공산주의가 결코 시장경제를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에 현 체제에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와 회의감까지 더해지면서 지도자에게 속았다는 회의감이 더해지면서 탈당을 선택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내가 살 곳은 공화국이 아니다. 인민을 진심으로 배려해주는 대한민국으로 가야 합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지도자가 나를 배신한 것이니 배신해도 죄가 없소." 이웅평 대위는 그렇게 귀순했습니다.

 

 

헌트